백년의 외침 복음의 정신

100년의 외침 소개
100년의 외침 소개

100년의 외침, 복음의 정신

1919년!, 그 때, 복음의 정신으로 민족을 가슴에 품고 3.1 만세운동을 준비하여 그 길에 나선 조선 기독교 청년들의 발걸음이 이후 100년, 이 땅의 역사를 바꾸고, 민족의 나아갈 길을 열었습니다!
꺼져가는 희망 속에서, 커져가는 일본의 압제 속에서, 조선 독립의 의지와 염원을 온 세상에 드러내고자 했던, 십자가에 걸린 목숨처럼 드려진 그들이 있었기에 3.1 만세 운동이 가능했습니다.
그 때, 1차 세계대전의 종식으로 식민지들은 독립할 수 있다는데 (파리강화회의, 1919-1920) ...
조선반도에 드리워진 강제합병의 그늘은 무단통치로 점점 짙어만 가고 (1910 이후) ...
조선의 쌀은 흉년 난 (1918) 일본으로 빠져나가 백성은 수탈로 허덕이는데 (쌀 값 5.7배 상승) ...
설상가상, 아버지 같던 고종황제의 억울함 가득한 의문스러운 서거는 (1919. 1. 21)
기어이, 눈물과 아픔으로 앉아 있던 백성들로 하여금 만세운동으로 나아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누군가는 선각(先覺) 하여야 했고, 누군가는 준비하여야 했으며, 누군가는 길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 시작과 준비와 실행, 이어진 민족의 행보의 결정적 지점마다 조선의 기독청년들과 기독인들 그리고 기독교학교와 교회가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었으나 언더우드 학당 (현 경신학교)에서 교육받은 깊은 신앙의 청년 김규식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조선 독립을 요구하기 위해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전, 개인이 아닌 백성의 독립의지를 보여줄 것을 요청합니다.

이를 전해들은 신한청년당의 역할로 일본에서 2.8 독립선언서를 준비하였던 조선청년독립단 (당시 일본 도쿄 유학생의 ‘학우회’ 중심)의 주도적 인사들도 대부분 기독교신자들이었으며, 그 2.8 독립선언 실무를 담당했던 조선기독교청년회(YMCA) 총무 백남훈 역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정신여학교 출신으로 신앙심이 깊은 김마리아는 복사한 2.8독립선언문 10여장 목숨을 걸고 조선으로 옮겨왔으며 이는 곧장 국내의 독립운동가와 민족 지도자, 국민들에게 알려져 3·1운동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만세운동의 두 거점이었던 평양과 서울을 연결시켜 두 곳 모두에서 만세운동이 주도적으로 일어나도록 지도력을 발휘한 이는 남강 이승훈 선생(장로) 이었습니다. 그를 통해 평양에서는 신한청년당과 길선주 목사, 양전백 목사가 함께 준비하였고, 서울에서는 기독청년단 (YMCA)을 통해 준비되엇습니다. 그는 또한 개별적으로 독립시위를 준비하던 천도교 이후 불교까지 아우르며 3.1 독립만세 운동을 준비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3월 1일 독립선언식 당일, 모여온 백성들의 안전을 위해 33인의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으로 이동하여 독립선언식을 진행할 때, 이를 알지 못한 채 모여있던 탑골공원의 수많은 백성들 앞에서 한 청년이 품속에 있던 ‘독립선언서’를 크게 낭독하게 되는데 그는 경신중학교의 만학도 정재용이었습니다.

그의 외침 후, 여기저기서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터져나오고, 꿈속에도 그리던 태극기가 다시 휘날리게 되었습니다. 이 날,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들의 확인된 수만 3000-6000이요 이 중 상당수가 경신학당, 배재학당, 이화학당, 세브란스의학학교, 신학교 등에서 온 기독청년들, 학생들이었습니다.

이 후에 이어진 독립만세 운동은 이 기독교학교의 학생들의 헌신을 중심으로 평양을 비롯한 전국으로 점차 퍼져갔으며 온 나라의 만세운동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전국 823개의 기독교학교들이 서울에서 시작된 3.1 만세운동이 퍼져나가는 거점들이 되었으며, 기독교학교의 학생들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들어 나누었고, 만세시위의 앞장에 서서 헌신하였습니다.

3.1 만세 운동에 대한 일제의 모진 탄압과 고문 속에서도 3.1운동으로 시작된 새 길은 상해임시정부의 수립으로 이어지고, 해외 무장투쟁으로 이어졌습니다.

무엇보다 기독교를 중심으로 농촌계몽운동과 여성운동, 그리고 당시 유일한 한글교육이 가능했던 주일학교운동 등으로 이어져 복음의 정신은 민족의 횃불과도 같은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3.1운동 100년이 되는 이때에, 역사는 기독교가 이 땅의 변화를 위해 걸었던 그 걸음과 헌신을 다시 기억하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백년을 이어온 이 외침이 오늘을 향한 복음의 정신으로 다시 이 땅에 외쳐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백년 전 복음의 정신으로 외치며 그 길을 걸었던 기독청년의 발걸음이 오늘 우리 시대의 청년들에게 이어져 이제는 북녘과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금번 “3.1운동 100주년 다음세대 기념사업”은 이 외침과 정신을 오늘의 다음세대와 함께 다시 기억하며 나아가고자 준비한 일들입니다.

전국의 기독교학교들이 함께 모이는 대회와 (2월 21일(목), 영락교회)
전국의 교회가 함께 드리는 예배와 (총회산하 전국교회)
역사적 의의를 다시 밝히는 학술대회와 (2월 21일(목), 영락교회)
이 3.1 운동에 담긴 민족애의 복음정신을 다시 배워보는 교육을 통해 (기독교학교와 주일학교 교육)
3.1운동 전시관 체험을 통해 (장신대, 영락교회, 창동염광교회 등)
3.1 절 한 주간 온 교우가 함께 깊이 묵상하는 묵상자료를 통해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역사의 어둠 짙었을 때에, 계명성 동쪽에 밝아 이 나라 여명이 왔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빛 속에 새롭다. 이 빛 삶속에 얽혀 이 땅에 생명탑 놓아 간다. (찬송가 582장 1절, 김재준 작사)

주관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협력총회교육자원부, 기독교학교정상화추진위원회

후원장로회신학대학교, 소망교회, 영락교회, 온누리교회, 잠실교회, 주안교회, 창동염광교회

삼일운동 백주년 다음세대 기념사업을 위한 삼일운동의 정신

삼일운동은 근대 공화사회[공화정 <->왕정]의 시민정신의 자각에서 비롯된 사건이라고 말한다. 조선 왕국과 (잠깐이지만) 대한제국, 그리고 일본제국의 구시대 체제를 넘어서서 근대 시민 정신을 가지고, 온 국민이 참여한 만세운동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근대 시민의식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하나님 나라 의식이었다. 특히 서북지역에 많이 포교되었던 장로교의 의회주의적 정치체제는 봉건적 사회에 머물러 있던 민족의 의식을 새롭게 일깨우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했던 여성, 어린 학생들이 오히려 주체적으로 참여하여 민족의 주인으로서 시민됨을 자각하고 만세운동을 벌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시민의식이 삼일운동이후 대한민국이란 새로운 국호를 생겨나게 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탄생케 했다.

아울러 삼일운동은 젊은 학생들의 연대와 주도 속에서 이루어진 사건, 즉 온 국민이 청년의식을 가지고 들고 있어난 사건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나라를 향한 뜨거운 마음을 가진 청년의식으로 하나된 사건이다. 독립선언서를 나누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일은 젊은이들의 노고와 열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여성들이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역사에 깊이 참여하게 되었다. 민족의 변혁의 순간에 가장 앞장서서 외쳤던 사람들이 젊은이들, 나이어린 학생들, 여성들이었다는 것이 놀랍다. 삼일운동은 일회적으로 끝난 민족적 이벤트가 아니라 그 이후로 독립을 이루기까지 지속적으로 일본외세에 항거하는 민족적 독립투쟁의 시발점이자 근원지라고 할 수 있다. 삼일운동의 주체는 기독교인이었다. 33인의 민족지도자대표에 기독교인이 16명이었던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특히 전국에서 가장 큰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7곳 중에 서울을 제외하면 모두 서북지역에 속하고, 이곳은 기독교 지도자들과 특히 장로교의 영향이 컸던 곳이다. 실제 서북지역에서는 교회와 목회자가 삼일운동을 주도하여 이끌었다.